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0.26 사건 (문단 편집) === 정권 반대 세력 관리 방식에 대한 대한 이견 === 민주화와 권력 다툼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김재규는 당시 정권 반대 세력 관리 방식을 놓고 박정희, 차지철과 상당한 의견 차이를 보이고 있었고 이것이 암살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유신의 심장인 중앙정보부의 수장이었지만 '''실제 부마항쟁 이후 김재규는 정권이 전복되는 것에 대해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다.''' 이미 부마항쟁 1년 전인 1978년 12월 12일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부터 이런 징후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유신 독재 정권의 압도적인 관권, 금권을 등에 업은 집권 [[민주공화당]]이 제1야당 [[신민당(1967년)|신민당]]에 지역구 득표율에서 오히려 뒤진 것이다. 당시 공화당은 31.7%, 신민당은 32.8%로 그 격차는 불과 1.1%p였지만, 민주화를 내세운 제1야당의 득표율이 집권당을 넘어선 건 헌정 사상 최초였다. 여기에 제3당인 [[민주통일당]]의 득표율 7.4%를 감안하면 10대 총선은 사실상 집권당의 참패였다. 지역구 당선자는 공화당이 68명으로 신민당의 61명보다 많긴 하지만 차이가 크진 않다. 박정희가 임명하는 [[유신정우회]]가 없다면 국회에서 공화당과 신민당은 사실상 박빙 상태였다. 실제 김영삼 체포 등의 야당 탄압, 민주화 요구 묵살 등에 대해서 김재규가 다소 온건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 그러나 박정희와 차지철은 끝까지 강경 일변도의 진압을 주장하였고, 박정희는 총기사용 진압을 차지철은 [[킬링필드|캄보디아에서 300만명을 죽였는데]] 우리라고 1~200만명 정도 못 죽일 것 없지 않겠냐는 소리를 했다고 김재규는 법정에서 진술했다.[* 다만 이 캄보디아 이야기는 김재규 일방의 주장이라 사실로 단정짓기에는 굉장히 무리가 많다.] 정리하자면 김재규가 민주화를 원했다기보다는 당시 정권 반대 세력들에 대한 관리 방식을 가지고 충돌이 일어나 살인까지 갔다는 의견이다. 자신들의 정권 반대 세력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는 좌-우를 막론하고 국가 통제가 강한 국가의 권력층에서 늘 논쟁거리다. 이 논쟁에서 위기의식을 느낀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다만 상기된 바와 같이 대중적 저항의 격화와 강경한 탄압, 그 탄압으로 인한 더 큰 규모의 저항과 또 다시 그만큼 따라오는 탄압이라는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당시의 박정희 정권이 말기적 상황에 접어들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